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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NI_NARA
여행이야기/느낌있는 경상도

만대산 고령신씨 신숙주의 시조묘역

by 무니.Muni 2011. 12. 26.

 

       만대산 (萬代山)

 

       경북 고령에서 경남 합천군 야로면으로 향하던 길에

       아주 커다란 입석이 서 있다. 만대산 고령신씨시조묘역 입구 ~

       아직 이른 시각이고, 또 다시 먼 길을 오기가 쉽지 않아 일행의 동의를 얻어

       차를 돌려 입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로 들어가 본다.

       자손이 만대를 걸쳐 영화를 누리라는 좋은 의미가 담긴 이름의 산 자락에 자리잡은

       묘터는 어떤지 궁금했다. 조선 세조때 문신 신숙주의 시조묘라는 설명에 더 궁금해졌다.

       평소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만대산 (萬代山)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내곡리·묘산면 거산리에 걸쳐 있는 산.

       고령신씨가 이 산에 시조 묘를 쓰면서 만대(萬代)에 영화(榮華)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만대산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높이는 688.7m의 만대산은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어 봄철에는 많은 관광객 및 등산객이 찾는 곳이다.

       만대산은 주변의 산지들과 연계하여 등산로가 있고, 만대산에서 700m 정도 북서쪽에는 해발고도 530m 정도의 매화재가 있다.

       이 매화재고령군 쌍림면합천군 합천읍 용계리를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으나 현재는 등산로로만 이용되고 있다.

       매화재지릿재를 통과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고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만대산의 북쪽에는 고령군 쌍림면이 위치해 있고, 지릿재에서 쌍림면 소재지와 고령읍 등으로 연결되는 국도 33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고령은 경북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인데 757년(신라 경덕왕)에 고양군이 되었고,

 

       그후 조선 태종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이라 하였으며, 1895년(조선 고종)에 성주 9면과 현풍 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이 되었다.

 

 

 

 

 

 

 

       층층이 다락논이었을 곳이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듯 했다.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들어갔다. 종점인 듯 한 곳에서 윗쪽으로 고목이 보인다.

 

그 옆에는 정자와 비석과 함께 나란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비석을 보니,  <고려문하시중남양송공행정유허비> 라고 씌여있다.

 

 

 

500년의 역사를 지닌 은행나무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고령신씨시조세덕비

      

 

 

 

고령신씨시조세덕비 를 지나 은행나무가로수길을 걸어올라간다.

 

 

 

 

은행나무 낙엽이 이리도 쌓여있는 길은 첨 걸어본다.

 

노오랗게 은행잎이 물들 때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와 ~~ 오르던 길은 햇볕도 없고, 쌀쌀한 아침공기에 추웠었는데,

 

시조묘에 다다르니, 완전 다른세상이다. 그렇게 높은 위치는 아닌데도 발아래 좌~~악 내려다보인다.

 

아름다운 능선들이 첩첩이 나를 향해 조아리고 들어오는 형국이라고 설명해 주신다.

 

 

 

 

 

 

 

 

 

 

 

 

 

 

 

고령 신씨(高靈 申氏)의 시조 신성용(申成用) 묘역

 

따뜻하고 눈 부신 햇살과 함께 바람 한점 없다.

 

 

 

 

 

 

 

 

 

 

 

 

패찰을 놓고 잠시 현장강의도 듣고... 자세한 이야기는 다 적지못하겠네요...*^^*

 

그냥 제 머릿속에만 담아 둡니다...

 

 

 

 

 

 

 

 

 

 

 

 

 

 

 

 

 

 

 

 

 

   고       고

             려

   령       중

             현

   신       대

             부

   공       감

             문

   위       위

             대

   사       호

             군

   경

 

   지

 

   단

 

 

 

 

 

 

 

 

 

 

 

 

 

 

 

 

 

 

 

 

 

 

 

 

      시조의 5세손 신덕린(申德隣)이 고려말에 좌사의대부와 예조와 공조판서 판서에 이르렀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공조참의를 역임한

      아들 신포시(申包翅)를 데리고 개성 두류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키다가 다시 광주 서석산으로 옮겨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신포시(申包翅)의 아들 신장(申檣), 신평(申枰), 신제(申梯)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맏아들 신장(申檣)은 직제학과 부제학을 거쳐

      공조참판에 올라 남산지곡을 지었으며, 오랫동안 대제학에 있었고, 둘째 아들 신평(申枰)은 사간원의 정언을 역임했고,

      막내 신제(申梯)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신장(申檣)의 아들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 신숙주(申叔舟) , 신송주(申松舟), 신말주(申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신숙주(申叔舟)는 6대 왕조를 거치면서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라 조선조의 기반을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명상으로

      추앙되었다. 신광수(申光洙: 첨지중추부사 신호의 아들)는 조선 영조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제주도에 가서 그 곳의

      풍토·산천·조수·항해 상황 등을 적은 부해록을 지어 문명을 떨쳤고 그의 대표작으로 당시에 널리 애송되었던 관산용마를 지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申潤福)과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등이 있다.

 

 

 

 

 

신숙주(申叔舟)

조선 세조 때의 문신(1417~1475).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泛翁)이며 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와 보급에 공을 세웠다.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 과 《북정록(北征錄)》, 《사성통고(四聲通攷)》 등이 있다.

 

 

 

 

 

 

 

 

산신제를 지내는 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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