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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NI_NARA
여행이야기/세계속의 경기도

[경기사찰여행]가을길목에 가는 여행길 호국불교도량 강화도 전등사 傳燈寺

by 무니.Muni 2013. 8. 31.

 

 

 

 

오랜만에....선들가을바람타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전등사(傳燈寺)를 찾아본다.

김포에서 강화도를 연결하는 초지대교를 건너면  국난극복의 요충지 전등사를 쉽게 찾아가볼 수 있다.

한낮은 더웁지만, 이젠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려는 여름의 서두름이 느껴지는 듯 하다.

 

오늘따라 하늘이 무지 파랗고 또렷하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날씨에 사뭇 세월의 무게감이 와락 덮친다.

 

 

 

 

 

 

 

대명항 대명포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 84번도로를 따라가 전등사엘 도착한다.

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하는데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종해루’ 를 통과해 전등사를 만난다.

 

이 종해루를 지나 50미터쯤 올라 좌측을 보면 전등사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세워진 부도전이 자리한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東을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東南을 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으며,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쪽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동북쪽으로 해발 107m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그 중에 유일하게 "종해루(宗海樓)"라는 이름의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다.

이처럼 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한다.

남문에 도달하여 바라보면, "종해루(宗海樓)"와 그 옆을 따라 전등사일대를 에워싼 석축이 보이는데

이 석축은 국가사적 제130호 삼랑성 으로 고대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삼랑성'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대 토성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았는데 성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하며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사용한 구조이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등사는 어떤 사찰일까?

 

 

전등사(傳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 옥등은 전등사에 없다.

수많은 세월속에서 소실되고, 중수되는 여러차례의 과정을 겪어낸 사찰이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고,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남문을 통해 전등사 전각들을 향하는 길 ~~

아직은 녹음이 짙지만, 곧 물들겠지 ~~~

 

 

 

 

 

 

 

 

남문을 통해 대조루, 종류를 향하다 우측에 보여지는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전등사 '윤장대(輪藏臺)'

이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의 지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 달라는 염원이 들어있다고 한다.

 

근데,,,,,윤.장.대는 뭐지?

 

윤장대(輪藏臺) -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오르던 길 가 돌탑을 쌓던 흔적속에 누군가 낑가놓고 간 리플렛의 글귀가 눈에 띄었다.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

 

 

 

 

 

 

 

 

 

 

 

 

 

 

 

 

대조루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염하'라고 불리우는 강화해협이 멀찌감치 내려다보이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 남문과 동문으로 올라오는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傳燈寺'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2층건물, 대조루가 전등사 불이문역할을 한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규모는 작으나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장식으로 조선중기 건축물의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둘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가되어있고,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 착각케하며 닫집왼쪽 천장에는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어놓아 이를 잡고 흔들면 아홉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九龍吐音)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한다.

내부의 유물로는 목조석가여래 삼존(보물 제785호)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며,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눠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나부상, 동물조각, 연꽃조각등의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수미단 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

 

수미단이란 절의 법당 정면에 불상을 모시는 대좌를 말하는데, 이것은 상상의 산(山)인 수미산형태의 단으로 부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계심을 상징화 한 것으로 상중하 3단에 연꽃, 구름, 만(卍)자를 새기거나 사자, 호랑이, 코끼리, 거북, 가재, 용(龍), 봉황, 스님, 동장, 사천왕,

비천,도깨비상을 조각하기도 하는데 광해군13(1621년)에 제작된 가로 4.8m, 세로1.2m, 폭2m 의 규모인 전등사 대웅보전의 수미단은

아름다운 색상이 오랜세월속에 많이 퇴색되어 있다. 수미단 옆쪽에 다행히 화려한 색상이 조금 남아있었다...

 

 

 전등사 대웅보전 지붕아래에는 희랍의 시지프스신화를 연상케하는 전설의 나부상 이 있다.

      찾아보는 재미도 ........

 

 

 

 

 

 

 

대웅보전, 명부전, 약사전, 향로전, 극락암, 종각, 종루등이 에워싸고 있는 큰마당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전등사를 찾은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있다.

 

 

 

 

 

 

향로전

 

법당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상궁이나 나인들이 기도하던 곳으로

지금은 상임법사실로 쓰고 있다.

 

 

 

 

 

 

 

 

삼성각 오르는 계단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사전 보물 제179호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로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명부전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구석구석 모두 다 둘러보진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무설전(無說殿)을 향한다.

 

 

 

 

 

 

 

 

전등사 갤러리법당 ~~ 무설전(無說殿)

현대 미술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서운갤러리' ....... "불교라는 종교와 예술의 공존과 조화를 위한 기도공간" 이다.

 

 

 

 

 

 

 

 

무설전 내 불상은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한 김영원 홍익대 명예교수가 제작, 전통성을 바탕으로 인체 비례를 반영했으며

후불 벽화에는 오원배 동국대 교수가 제작, 서구식 프레스코 기법이 활용됐고, 공간 디자인은 이정교 홍익대 교수가 완성....

 

무설전 입구 부분의 공간을 특화한 서운갤러리에는 현대 미술 작가의 창작품을 전시한다.

 

 

 

 

 

 

 

출가일, 득도일, 열반일이 모두 같았다던 서운 큰 스님 의 열반송을 적어본다.

 

 

 

비록 형상 없지만 두드리면 곧 신령스러움 있고

삼독으로 화탕지옥에서 평생을 지냈다.

이제 몸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니

차가운 달, 빈 산이 진리의 몸이로다.

 

 

 

 

 

 

국난극복의 호국도량 등사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였던 곳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을때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였는데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군인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었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죽림다원

 

본래 전등사에 구성되었던 승병의 초소가 있었던 자리였으나 지금은휴식처 겸 다원(茶園)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등사를 휘~~ 둘러보고, 잠시 이 곳에 앉아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혀본다.

해우소엘 들러 비우는 즐거움도 느끼고 ....  도란도란 이야기꽃도 피워보고....

차 한잔의 여유로움도 갖는다.....

 

 

오랜만에 찾았던 전등사 많은 것을 담아왔다.

눈으로 마음으로 느낌으로......

 

 

올 가을 단풍이 들면서 겨울도 찾아올테지...

선들 갈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잊지말고 언제나 깨어있어야 할텐데.....

 

 

 

 

전등사   http://www.jeondeungs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