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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NI_NARA
여행이야기/느낌있는 경상도

대구/인흥마을 남평문씨본리세거지

by 무니.Muni 2011. 7. 5.

 

Inheung Village (南平文氏本里世居地)


 

남평문씨 본리(인흥)세거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401-2 / ☎053)637-5416

남평문씨인흥세거지는 19세기 중반 삼우당(三憂堂)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문경호(文敬鎬/1812~1874)가

지금의 광거당(廣居堂) 자리에 용호재(龍湖齋)를 건립하면서 조성된 곳으로, 1910~1940년경에 용호재 주위에 남평문씨 일가의 살림집과 재실 등이 지어졌다.
가옥9채, 재실1채, 정사1채, 문고1채가 정전법 구도로 형성되어있으며, 대가족 생활양식의 전형을 볼 수 있는 마을로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있다.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인흥서원 등이 대표할 수 있다.

 

 

고려말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가 집을 짓고 그 후손들이 집을 지으면서 집성촌이 되었다.
인흥마을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오어사에서  이곳에 와 (1264년)

중창하여 인흥사라하고 11년간 주석한 이곳  인흥사지에 지어졌다고 한다.

 

옛 인흥사 절터임을 알수있는 삼층석탑 2기중 파탑이 되어 허물어져있는 1기이다.

1264년 일연스님이 이곳에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황폐화된 땅을 문익점의

문익점(중조 문익의12세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인흥마을의入鄕祖-중조의30세손)가 터를 잡았다.

 

 

 

 

민속자료 제 3호  

 대 문


 

 


 

[수봉정사(壽峯精舍)]

화원읍 본리리 남평문씨 본리세거지 내에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6년 수봉 문영박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사(精舍)이다.

일명,수백당(守白堂)이라 하며 희봉 하겸진의 기문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중당협실형태이다.

마당한쪽에 석가산을 쌓고 정원을 꾸며 괴석과 세 그루의 소나무와 모과나무, 배롱나무 등을,

담장 밑에는 꽃단(花臺)을 꾸미고, 매화나무 단풍나무 앵두나무를 심었다.

수봉정사(壽峰精舍)는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였던 곳이다.

 

 수봉정사를 문밖에서 빼꼼이 들여다 봅니다.

 

 

  노송 아래에 자리한 음각의 거북이 

이광원 석주 

 

이광원(彛光園)이란 언제나 떳떳이 변하지 않고 빛나는 정원이란 뜻이며,

귀석(龜石)은 무병장수와 화재예방등 제액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백당  우당 유창환  (愚堂 兪昌煥) 1870~1935. 문인. 서예가. 호:우당,六一居師. 자:지백,준백. 본관:기계. 초명:명환.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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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지대불유한 

물흥구생개유득 

 형도위통서류번

 원공조시사인저

 

수봉정사 주련    석산 김흡  

                         元公肇始斯仁著(원공조시사인저) 원공(수봉)께서 그 인을 펴내기 시작하여, 
                         亨道爲通庶類蕃(형도위통서류번) 도를 형통하여 널리 퍼뜨리니 여러 무리가 번성하게 되었으며, 
                         物興俱生皆有得(물흥구생개유득) (이로써) 만물을 일으켜 두루 생명을 갖추어 모두가 만족하더라.
                         德雖至大不踰閒(덕수지대불유한) 비록 덕은 제일로 큰 것이라 하나 (선비의) 그 한가로움을 이기지는 못하더라.

 

 

 

  履淸閣  문징명書 

    文徵明 1470~1559  호: 형산(衡山). 본명:벽(璧).  자:징명(徵明),징중(徵仲). 

 

 

수봉정사 누마루

 

 

敬遺堂  위창 오세창(1864~1953)

 

 

快活 

노완 김정희 書     추사 김정희 (1786~1856)  

 

 

대문 둔테+빗장  거북이 등의 坤 + 乾 ↕ 

 

곤.건으로 木거북이 한쌍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듯하다.

 

 

 


 

[광거당(廣居堂)]

고종9년(1873) 후은공 문봉성이 문중을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후손들의 수학공간이며, 학문을 논하는 장소였다.

이 건물은 丁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5칸의 겹처마팔작지붕이다. 광거당이라 편액이 달린 전퇴가 있는 전면의 향우단간이 앞으로 불쑥 돌출된 누마루가 있다.

 

 낮은 기와토담인 헛담은 광거당 건축미의 백미이다.

 

 

  석촌 윤용구 (1853~1939)  광거당

 

 

 추사 김정희 (1786~1856)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인수문고(仁壽文庫)]

인수문고는 2만여권의 국내외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보존하던 건물이며,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문중문고이다.

1980년 초에 사고를 새로 지었다.

 

제일 어르신

 

 

 

 

목판

 

 

토담에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참 이뻤습니다.

 

 

우물井자 모양을 제대로 갖춘 돌우물

 

 

TIP

시조는 문다성(文多省)으로서 그의 탄생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 동쪽에 장자지라는 큰못이 있고, 그 못가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그곳 군주가 그 바위 아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서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 왔다. 이상히 여긴 군주가 바위 위에 올라가 보았더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속에는 피부가 옥설 같이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기가 들어 있었다. 군주가 아이를 데려다 기르매 나이 5세에 문사에 저절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 총기가 있었다. 그래서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나주군남평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서너 마장쯤 가면 장자지라는 큰 못이있고, 그 곁에 우뚝 솟은바위가 있어 남평문씨 시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바위 위에는 후손들이 <문암(文巖)>이라는 비석을 세워 놓아 문씨 시조의 탄강지임을 말해 주고 있으며, 장자지는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못가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조의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본관은 시조 문다성이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 삼한벽상공신에오르고 남평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평으로 관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공원(文公元)·문공유(文公裕) 형제의 묘지명에 의해 고려 숙종 때 우산기상시를 지낸 문익(文翼)을 중조 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중조3세인 문극겸(文克謙) 의 두아들중 문후식(文候軾)의 8대손 문익점의 자손이 이곳 화원에 자리잡게 된것이다.

 

<찾아가는 길>